(사진: Stowe Mountain Lodge, Stowe, VT)
지난 몇달간 아침 걷기하면서 아침 시간이 부족해 그 시간을 성경듣기로 대신하다가 요즘 날씨관계로 집안에서 시간 보내는 시간이 길어져 둘 다 소홀해 졌다. 요즘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페이스북에서 나눴던 묵상들을 옮기고 있다. 그러는 도중에 하나하나 다시 읽어 보니 내가 참 받은 복이 많았구나 하는 감사가 새삼 든다. 그래서 오늘 아침 생명의 삶 본문을 찾아 다시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여 본다.
베드로가 예수께 용서의 문제를 가져 왔다. 그는 나보다 인자한 자 같다. 나 같으면 한번 용서도어려운데 "몇 번까지'를 묻고 있다. 베드로가 그렇게 참을성이 많았었나? 아니면 율법에 익숙했던그들 문화에, 새로 오신 '예수의 법'이라도 정하려 했던 걸까? 그 숫자까지만 억지로 라도 용서하고 나면 그 다음엔 아무래도 자유로와 질테니까?
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를 잘 모르고 있음은 분명하다. 그분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. 절대로!
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니… 총 490 번이나 된다. 내 평생에 내게 490 번씩 용서받아야 할 짓을 할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....종종 듣는 설교에선 이에 대해 뻔한 적용들을 하곤 하지만, 그래서이미 답을 다 알고 있어 '응, 이건 내가 어차피 하지도 못 하는거니까' 하고 넘어가 버리겠지만, 기왕 오늘 본문이나 한번 더 짚어도 좋을 듯 하다.
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의 비교를 이야기 중에 끌고 들어 오신 예수님. 난 이미 많이들었어도 이 두 금액의 비교를 굳이 하고 싶지 않다. 어차피 예수님은 어림도 없는 금액으로 비교하셨을테니까... 내가 주께 진 빚의 크기가 내가 죽을 때까지 어떤 수고를 하여도 절대 갚을 수 없을 규모라는 걸 주님은 깨닫게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. 그 반면에 내가 남에게 뀌어준 거라야 정말별 볼일도 없는 걸 제발 좀 알으렴 하시는 것일 터이다. 그게 설사 7번씩 70번을 못 갚는다 한 들그게 코끼리 앞에 비스켓이라는 이야기다.
내가 그런 용서를 받은 자인걸 아느냐고 그분이 내게 묻고 계신 거다. 내가 깊은 바다 가장 깊은곳에서 주를 만났다면 나의 감사는 그 바다의 깊이일 것이다. 이 감사는 해수면에서 풍랑처럼 놀아 나는 파도와는 다른 무게감이고 절대 흔들릴 수 없는 안정일 것이다.
그렇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나에겐 그런 걸 음미하며 살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다. 그래서 나에 대한험담 하나에 파르르 떨곤 하는 것이다.
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주님이시라 했나? 그분이 내게 기대하시는게 뭘까? 맨날 실패하는 삶에서 허구한 날 통회하고 자복하고 죄인이라고 가슴치는 걸 보고 싶으신 걸까? 내겐 그런 신앙 생활이 주님을 모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건 왜 일까? 어차피 진토와 같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내게 던지는 메시지는 '아들아! 내가 다 알아. 그렇게 힘 쓸 필요없어. 용서가 안되면 내게 던지고넌 너하던 대로 살으렴' 하시는게 아닐까? (마 18:21-27)
댓글 없음:
댓글 쓰기